명불허전. 과연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을 만한 작품이었다. 오늘 내가 잘 몰랐던 세 가지 경이로움을 알게 된 것 같다. 판소리의 경이로움, 브레히트의 경이로움, 그리고 이자람 씨 본인의 경이로움. 판소리+브레히트+이자람=미라클이네. 판소리가 이렇게 무한한 저력을 지닌 장르였구나. 브레히트 서사극의 이념-관객이 무대 위 사건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배후의 원인(세계)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구나. 젊은 나이에 팔색조 같은 연기를 능란하게 해 내며 무대를 꽉 메우는 이자람 씨의 재능은 또한 정말로 놀라웠다.
이 공연을 엄청 기대하면서 기다리면서도 두 가지 의문이 들었었다. 하나는 왜 브레히트일까? 또 하나는 왜 객석을 엘지아트센터 무대 위에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자람의 억척가는 거기에 훌륭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처음 이 공연을 알게 되었을 땐 왜 굳이 브레히트일까? 라는 의문이 좀 들었었는데. 사실 난 브레히트 희곡들을 읽어봐도 그렇게 대단한 줄도 몰랐다. 연극으로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봤을 때도 좀 애매했고. 사실 꽤 오래된 작품들이기도 하고 서사극 기법 자체가 오늘날에 쓰이기에는 좀 진부하고 어설프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서... 특히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판소리로 만들면 그냥 신파 되는 거 아냐?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실제로 원작 충실하게 옮긴 억척어멈 연극도 신파로 흘러가는 바람에 브레히트의 의도를 살리는 데는 좀 실패한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게 재구성해 내더라. 판소리와 브레히트가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사실 창자가 서사에 무시로 개입하는 판소리와 브레히트는 찰떡궁합일지도. 서양 배경의 줄거리를 매끄럽고 천연덕스럽게 우리식으로 재창작했을 뿐 아니라, 웃음과 눈물이 수시로 교차하면서 브레히트적인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첫째가 바로 그 전쟁 때문에 방금 죽으러 지나간 줄도 모르고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며 좋아하는 억척네의 그 가슴 서늘해지는 대조라니.(이때 주변은 까맣게 어두워지면서 억척네를 환하게 비추던 조명도 레알이었음;)
억척네가 휘말려든 그 억척스런 세상 자체의 무서운 존재감을 체현해 내는 이자람 씨의 연기는 가히 천재적. 정직이의 죽음을 따지러 갔다가 권력의 무서움을 눈으로 보고 두려워 떠는 안나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이고, 그 작은 안나를 둘러싼 세계는 너무나 거대해 보였다... 1인극이면서 여러 인물들을 능란하게 소화해 낼뿐 아니라 그 인물들을 둘러싼 세계 그 자체의 거대하고 잔혹한 힘까지 무대 위에 구현해 내는 능력이라니;; 대단했다. 브레히트를 가져온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단순히 판소리를 세련되고 맛깔나게 현대어로 고치는 수준을 넘어서,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어떤 작품보다도 첨예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냥 장르고 뭐고를 떠나서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이 작품 이후로 이제 누가 무슨 깡으로 브레히트를 가져오니.
가설객석은 원래의 객석쪽을 바라보도록 무대 안쪽에 설치되었다. 원래의 객석은 흰 천으로 덮여 있고. 이럴 거면 사실 그냥 바닥을 무대로 쓰는 연우소극장 같은 작은 극장에서 해도 된다. 굳이 큰 엘지아트센터에서 그 많은 원 객석들을 포기해 가며 올리는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그 텅빈 객석 자체가 연출에 활용될 줄이야. 조명이 비춰지면서 천 너머로 흰 천에 덮인 넓고 넓은 객석이 보이는 순간 가슴이 털컥거렸다. 그 나를 전부 빨아들여 버릴 듯한 거대한 쓸쓸함이라니. 그리고 마지막에 추선이가 죽으면서 무너내려앉는 천 너머로 그 객석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의... 아, 눈물 솟아...크크ㅠㅠㅋ 원 객석 위를 질러 설치된 흰 천은 뭔가 했더니 억척이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삶을 향한 길이었다...
1막에서 정직이가 죽고 안나가 리터럴리 피가 끓는 절규를 터뜨릴 때 거기에 공명하는 듯했던 땅울림 효과도 무대 위 객석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장치겠지. 안나의 절규가 귀로, 다리로, 온몸으로, 심장까지 와 닿는 느낌이었다. 몸을 울리는 바닥 진동에, 코가 아찔해지는 탁주 내음에, 레알 4D로구나 크크 이자람 씨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과의 기막힌 조화, 조명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효과도 정말 최고였다. 특히 조명! 조명!
아, 뭐라 정리된 글은 못 쓰겠고 계속 인상 깊었던 장면들, 마음을 뒤흔들었던 감동과 숨이 막히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던 순간들이 간헐적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정직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 안나의 미칠 듯한 갈등, 결국 아들의 베어낸 머리를 모르오 하고 보낸 후 빈 금고를 보며 간장을 토해내듯이 뿜어내던 절규, 그 땅울림, 마치 장군의 서슬퍼런 모습이 눈에 보일 듯 한없이 자그맣게 위축되던 안나의 모습, 억척네라고 불러달라던 그 독기 충만한 표정, 추선이의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북을 울려대던 추선이의 몸짓과 새빨간, 아주 새빨간 무대, 핏발 선 눈으로 저격하는 군인, 폭 주저앉는 붉은 천 너머로 드러나는 푸르고 검은 심연 같은 객석....... 아..........
최근 덧글